오늘 본문은 창세기 12장의 데쟈뷰와 같은 사건입니다. 배경이 애굽과 바로에서 그랄 지역과 아비멜렉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도 아내를 누이라고 말함으로써 아비멜렉이 아내 사라를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비교적 태평해보입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라에게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상태였는데, 지금 아내를 아비멜렉이 데려가 버렸으니 그 약속이 깨어질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겉으로는 태평해 보입니다.

정작 애가 타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급히 나타나서 개입하십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라를 안전하게 지켜 주심으로 당신의 약속이 훼손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인간은 자꾸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그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기고 계셨습니다. 이미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다시 넘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존재의 현주소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보여주었습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주지를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옮겨간 곳이 네게브땅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은 광야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랄은 목초지가 많은 평야였습니다. 헤브로은 산지였죠. 그러니까 산지에서 양떼를 키우기 좋은 목초지가 좋은 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마치 롯이 소돔 근처땅을 선택한 것처럼, 아브라함도 목양을 위해 이곳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선택이 이런 잘못을 반복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내려온 선택이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큰 위기를 가져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번에도 개입하셔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게다가 7절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돌려보낼 것을 명령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당신의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야 그와 그의 가족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복된 잘못에도 이방인들 앞에서 아브라함을 꾸짖으시기보다 오히려 그들 앞에서 높여주십니다.

그의 기도가 아비멜렉을 살리게 될 것이라는 선언은 아비멜렉에게는 굉장히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단순한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까이 두고 아끼시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화가 자기에게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브라함을 향해 두려움을 갖게 하셨습니다.

아비멜렉만이 아니라 그 민족에게도 아브라함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큰 존재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르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아브라함을 꾸짖어 부끄럽게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이를 택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지 못할 테니 오히려 아브라함을 높이심으로 이방인들에게는 두려움을 갖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 징계를 받은 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신앙인의 허물을 대할 때 우리가 어떤 방식을 배우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오늘 본문은 가르쳐 주시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시고, 당신의 사람을 세상 대하여 높여주시는 분이시며, 허물을 가려주시는 분이심을 만나게 됩니다.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심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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