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일 본문까지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가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하신 대로 응답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삭(웃었다)이라는 뜻은 긍정적인 웃음의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비웃다’의 뉘앙스가 강한 단어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짓게 된 사연이 있죠.

그 전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아브라함이 속으로 ‘이 나이에 어찌’ 하면서 웃었고, 18장에서는 사라가 또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처럼 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었다)로 짓게 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9세 때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사라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라고 말하죠. 여기에 그 ’웃었다‘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9절에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고 되어 있는데, ’놀리는지라‘로 번역된 단어가 ’웃었다‘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게다가 원문에는 ‘이삭을’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생명의 삶 금요일 해설 부분에도 그게 언급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절에서 사라가 ‘나를 웃게 하시니,,, 사람들이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의 ‘웃다’라는 단어 모두 일관성있게 번역하면, 사라는 99에 자식을 낳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나이에 자식을 낳다니 하나님이 나를 비웃음거리로 만드시네, 사람들도 나를 다 비웃을 거야’ 이런 뉘앙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하갈의 아들이 ‘이삭울 놀리눈지라’도 ‘하갈의 아들이 비웃었다’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어느 구약학자는 말합니다.

이스마엘이 자기의 노년의 출산을 비웃는(혹은 그렇게 태어난 이삭을 비웃었다)것을 어느 날 사라가 목격하고 그들을 쫓아낸 것이라는 해석이 전체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사라 자신도 노년에 자식을 낳은 게 부끄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몸종인 하갈의 자식이 자기에 대해 비웃는 것은 참아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하갈 모자를 쫓아내라는 사라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큰 근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사라의 뜻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갈 모자도 아브라함의 자식이므로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이미 16장에서 하갈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하갈에게 하신 약속대로 그들을 돌봐주시고, 이스마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때까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20절).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하갈에게 하신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위에도 부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