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을 팔아넘긴 후 유다가 가족들의 품을 떠나 가나안의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가나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셋 두는데, 엘, 오난, 셀라입니다. 첫 아들을 장가보낼 정도로 세월이 흘렀고, 다말이란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죽게 됩니다. 장남이 자식이 없이 죽었으니 그의 대를 잇기 위해 유다는 둘째인 오난을 다말과 결혼을 시킵니다. 그러나 오난은 형의 대를 잇게 하기 싫어서 땅에 설정하는데, 그것이 반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형의 대를 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난을 죽게 하십니다.

두 아들을 잃은 뒤 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두 아들 모두 자기의 죄로 인해 죽음을 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마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셀라가 아직 어리니까 장성한 후에 혼인을 시키겠다는 말로 변명하였지만, 실상은 셀라가 죽을까봐 겁이 난 것입니다.

다말은 그렇게 며느리의 권리를 박탈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중에 셀라가 장성한 후에도 유다가 자기를 부르지 않는 것을 보고 다말은 독자적으로 자식을 이을 계획을 세우고 유다에게 접근합니다. 유다는 얼굴을 가린 다말을 창녀로 착각하여 성매매를 합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성매매의 댓가로 담보물을 달라 하여 도장과 끈, 지팡이를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둘람 사람 히라를 시켜 돈을 주고 담보물을 찾아오려고 하지만, 히라는 그곳에 창녀가 없다는 말만 듣고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석달이 지나 유다는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화가 난 유다는 그녀를 불사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말이  세 가지 담보물을 유다에게 보내면서 ‘이 담보물들의 주인이 자신을 임신시킨 장본인’이라고 알려줍니다. 그것을 본 순간 유다는 자신이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은 것이 이 모든 일의 원인임을 깨닫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말하며 그녀의 임신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말은 쌍둥이 형제를 낳았는데 그 중에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이 되지요.

이 본문은 우리 시대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 되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방법에 대해 정말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녀를 낳지 못하면 부끄러운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고, 그 자신 또한 생존을 보장받기도 어려웠던 시대에 어떻게든 자녀를 낳아 인정받고, 삶을 이어가려고 했던 한 여인의 처절한 생존기 같아 보입니다. 그런 여인의 고독하고 외로운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대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 은혜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다에 대해서는 그의 실수와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셉을 팔아넘기자고 했던 유다는 가족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되어 사는 길을 택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가 기대하는 삶이 아닌 일들이 벌어집니다.

아마 이 일들 후에 유다는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39장에서 다시 나오는 요셉은 형들에 의해 강제로 가족을 떠나 애굽인들 속에 함께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삶을 보여줍니다. 마치 유다와 요셉을 비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비로운 점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 모두를 당신의 구원 역사에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분의 생각과 계획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아해 하다가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어쩌면 유다의 이야기보다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 은혜라는 말밖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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