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나안땅에 기근이 들었는데,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기근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게다가 전에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도 다 떨어져서 앞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여전히 야곱은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식량이 떨어지고 나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먹을 식량을 사 오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설득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만 가서는 양식을 구할 수 없고 반드시 베냐민을 데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쓸데없이 동생 얘기를 왜 했느냐며 타박하는 야곱에게 자신들도 애굽 총리가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구를 할 줄은 몰랐노라면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께 데려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 죄값을 평생에 치르겠다고 야곱을 설득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데려가도록 허락합니다. 대신 가나안의 특산물을 가지고 가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난 번 자루에 돈을 도로 가지고 가도록 합니다. 조금이라도 해를 당할 요소를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원해 줍니다. 아들들을 보내지 않으면 어차피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른 자식들의 다짐을 믿어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근의 심각함이 야곱의 고집을 꺾게 되었습니다. 아마 식량이 넉넉하였다면 야곱은 결코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삶의 곤고한 현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특히 그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도 노예의 삶과 죄수의 생활을 넘어선 이후였습니다. 가나안에서 있었다면 결코 이같은 지위와 환경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요셉의 신실함이 힘을 보탠 것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에 종종 이같은 곤고한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다시 애굽에 보내기로 결정한 배경에도 심각한 기근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요셉과 베냐민의 만남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곤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삶의 형편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주님의 선하신 계획과 뜻이 있음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4절의 야곱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서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낙담되어 하는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고 구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믿음이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성숙한 믿음은 아닙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아멘’할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는 바울이 빌4:12에서 말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말씀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의 성숙함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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