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은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먼저 하와가 아들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낳은 첫 사람들입니다. 가인은 자라서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키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땅을 섬기는 일과 생명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하는 일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늘은 그것과 관련된 하나의 메시지만 전하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의 일에 결실들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이 얻은 결실들을 하나님께 가져와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과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가인은 화가 많이 났고, 그 화를 품은 채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고 마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상하게도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중요한 문제처럼 보이는데,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히브리서 11:4에 의하면 아벨이 가인보다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해설하는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정작 창세기 자체에서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사실 아주 궁금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3절과 4절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절은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이고, 4절은 “아벨도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3절엔 있는데 4절에 없는 단어가 있죠? ‘제물’이란 단어입니다.

가인은 제물을 자기가 정했습니다. ‘이거 내가 하나님께 드리기로 정한 제물인데 받아주세요.’ 이런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아벨은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께 자기의 양의 첫 새끼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제물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즉 받으실지 안 받으실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임을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가 정해버린 뒤에 하나님에게 받으시라고 요구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실지 안 좋아하실지 가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가 정한 것 받기만 하면 되신다는 자세죠. 그러나 아벨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내가 드리는 것을 제물로 여기실까 하며 조심스레 드렸습니다.

자기중심성의 가인과 하나님 중심성의 아벨의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중요해집니다. 그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제물로 여겨주시고 그 제물만이 아니라 그 마음을 품은 아벨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마음이 아벨을 닮기를 기원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정하고 하나님은 그저 자기가 정한 것을 들어주고 받아주고, 이뤄주기만 바라는 가인은 제물도 그 자신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가인의 비뚤어진 자기중심성은 결국 형제살해라는 최초의 죄악을 잉태하게 했습니다. 자기중심성이 죄의 통로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본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성에 뿌리를 두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예배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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