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부터 9장은 노아와 홍수심판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며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좋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육신’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생령’에서 ‘육신’이 되어가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의 연수를 제한하셨는데, ‘육신’이 된 인간이 5절과 11절의 ‘죄’, ‘부패’, 포악’을 낳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육신’이 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결국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 인간 사회는 하나님을 경외함보다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죄악이 너무 심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이유가 당신이 창조하신 존재가 ‘생령’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육신’으로 전락한 것에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을 후회하게 만드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령’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령’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제 읽은 아담의 계보를 보면, 가인의 후손은 기록되지 않고, 오직 셋의 후손들만 기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계승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창세기의 이야기를 통해 ‘생령’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심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기억하고 헤아리게 됩니다. 왜 이 땅에 사람을 내셨는지,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섬기기를 원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동행하며 산다는 것은 서로 뜻을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뜻이 맞지 않으면,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한 시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에녹도 노아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갔으며,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육신’이 아닌, ‘생령’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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