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온전한 삶과 달리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람이 ‘생령’이 아닌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세상에 나타난 두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첫째는 땅이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인간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땅을 섬기게 할 목적으로 창조된(2:5) 인간이 사명을 잊은 존재 즉 ‘육신’이 된 결과 땅을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부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파괴되다, 상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땅이 부패하였다는 말은 땅이 파괴되어 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땅에 속한 인간도 부패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그 부패함의 결과로 세상에는 ‘포악함’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포악함’이란 ‘폭력’을 의미하는데, 폭력이란 부패한 마음의 기저에서 잉태되는 것입니다. ‘폭력’의 대상은 늘 약자들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배운 자가 배우지 못한 자를, 큰 자가 작은 자를 향해 행하는 심리적, 물리적 억압이 폭력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생령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겸허함과 존중함을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존재하는 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은 사람 사이에서 끊이지 않게 됩니다.

6장의 맥락에서 보면, 두드러진 심판의 원인이 폭력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폭력은 하나님에 의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심판이 바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시간만큼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유예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 기회마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방주는 네모난 상자 모양으로 지었습니다. 방주는 히브리말로 ‘테바’라고 하는데, 어린 모세를 담아 나일 강에 띄울 때 사용한 갈대상자도 원어로는 ‘테바’입니다. ‘상자’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노아가 설계대로 제작하였습니다.

마치 성막을 짓는 것과도 연상될 수 있는데, 성막도 설계는 하나님이 하시죠. 즉 구원은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십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은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심판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심판은 또 다른 시작이 됩니다. 노아와 같이 순종하는 이들에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이 될 때 심판은 우리에게도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령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에 순종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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