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학자는 창세기 9장에 대해 창세기 1장의 ‘다시 쓰기’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을 반복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장과 달리 9장에는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단어에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9장에서 이 두 단어를 포함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피조세계에 대해 함부로 힘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힘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장은 1장의 ‘다시쓰기’라는 것입니다.

폭력은 심판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보통 자연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사람이 동식물에 대해 행해지는 물리적인 행위로 인해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에서는 반드시 물리적인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적 폭력이 있을 수 있고,  군대, 혹은 학교나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소외, 따돌림 같은 행위도 일종의 폭력입니다.

20절 이하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왜 노아는 자기의 아들을 저주한 것일까요? 함이 행한 일이 과연 그와 같이 징계를 받을만한 것인가요?

오늘 사건의 발단은 노아의 술취함에 있습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벌거벗고 잠에 취해버렸습니다. 22절에 보면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고, 형과 동생에게 알렸습니다.

그에 반해 23절에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옷으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나중에 술이 깬 뒤 그 일에 대해 전해들은 노아가 함을 저주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함을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가나안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부족들과 관계가 나쁜 이유가 이때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기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폭력을 심판하시고, 함부로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시는 9장의 가르침 속에서 이 사건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었습니다. 누군가가 숨기고 싶은 수치나 부끄러운 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밖으로 드러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오히려 덮어주고 모른척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일종의 폭력을 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것이 얼마 전인데 함이 그것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관계에 있어 중요한 메시지를 9장에서 전하고 계십니다. 관계의 바탕에는 협력, 돌봄,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물리적, 비물리적 폭력은 끊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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