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고 나자 백성들이 각자의 장막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더니 각자 마음에 감동에 따라 각종 패물과 예물, 옷감과 가죽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 모두 자원하여 드렸다고 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얼마 전 자신들을 위한 우상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헌물을 바쳤던 이들과 달리 이 사람들은 성막과 에봇을 위해, 하나님의 처소를 위해 예물을 바쳤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소유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시간, 장소, 소유를 구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백성들이 바르게 응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헌물만 드린 것은 아닙니다. 25절과 26절에 보면 마음에 감동한 슬기로운 여인들이 실을 빼서 청색, 자색, 홍색 실을 가져오고, 염소 털로 실을 빼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슬기롭다’는 단어는 ‘지혜롭다’는 의미의 ‘호크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익숙하다, 숙련되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표현하면 염소 털에서 실을 뽑는 일에 숙련된 여인들이 염소 털로 실을 뽑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성막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숙련되었다는 이유로 모두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된 사람’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가진 재능을 드리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 중에 자기의 재능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다고 볼 수 있는데, 오직 마음에 감동이 있는 사람, 마음에 원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드린 것입니다.

이 부분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부는 바나바와 같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의 일부인 땅을 공동체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드렸을 때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땅을 팔아 그것을 사도들 앞에 드렸으나 땅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그들에게 큰 화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행위에 왜 이런 큰 화가 임했을까요? 단순히 땅값을 속여서만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의 의도는 바나바가 칭송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 영광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판값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속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거짓을 둔 것입니다. 다 드리기 아까우면 ‘땅 값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입니다’라고 얘기하고 드려도 되는 것을, 하나님은 당신을 속이려한 아나니아의 행위를 심각한 죄로 여기셨습니다. 아나니아의 헌신은 그 의도가 출발부터 선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백성들의 마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든 우리의 진심, 기뻐하는 마음이 동반되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와 같은 감동에 의해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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