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79장

하나님은 초태생을 당신에게 거룩히 돌리라는 말씀을 한 번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2절에는 ‘거룩하게 하다, 카다쉬’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12절에는 ‘돌리라’로 번역한 ‘아바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아바르’라는 단어는 여기서 ‘지나가게 하다, 데려오다, 넘겨주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데려오고, 넘겨주라는 뜻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한 초태생을 하나님께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나귀는 새김질하지 않고 굽이 갈라져있지 않기에 정결하지 않은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으로 대신해서 바쳐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려거든 그 목을 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처음 등장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대속’이라는 단어입니다. 나귀는 정결하지 않은 짐승이어서 나귀 대신 양을 바칩니다. 장자는 레위인으로 대신합니다. 대신 바쳐지기에 ‘대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대신 죽는 희생의 사랑은 값으로나 이성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 죄값을 치러주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자가 죄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대속자 되신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특별한 사랑의 수혜자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여정을 블레셋 땅을 가로지르게 하지 않으시고 홍해 광야 길로 돌리셨습니다. 아직 군대도 없는 오합지졸과 같은 사람들에게 거친 블레셋을 맞서게 하면 도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약하기도 하고, 때론 미련하기도 하여 어려움이 생기면 과거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가집니다.

신앙을 가졌다가도 어려움이 찾아오면 옛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신앙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쉽게 무너져버리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연약함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의 임마누엘하심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시기에는 이렇듯 눈에 보이는 표적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에 요셉의 유골이 있었다고 19절에 기록합니다. 요셉은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실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에 그때가 오면 자기 유골을 믿음의 열조들 곁에 두도록 유언을 남겨 조치하였던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 유골이라도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바란 소망의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지키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골로 약속의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믿음은 히브리 기자가 말한 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늘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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