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00장

산파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출산율을 낮추려는 계획도 틀어지자 바로는 온 애굽에 명령을 내려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가 출생하게 되면 즉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레위인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출생을 세달 동안 숨겼습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을 누구라도 알게 되면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달이 지나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이를 나일강에 띄워보낼 생각을 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강물에 실려보내야만 하는 처지가 이스라엘의 고단하고 암울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자식의 생명조차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처지가 그들의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현실을 두고만 보시는걸까 라는 원망이 저절로 나올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물에 띄워보내는 것은 아이에 대한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어둡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하는 행동입니다. 아이의 엄마는 갈대상자를 만들고 물이 새지 않도록 안팎으로 역청을 발랐습니다. 이 상자는 아이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노아의 방주와 아기가 담긴 갈대상자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기를 담은 갈대상자는 강물을 따라 내려갑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누이에게 지켜보라고 말합니다. 누이는 상자를 지켜보며 따라 걸어갑니다. 그러던 중 강에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딸이 상자를 발견합니다. 열어보니 히브리 아이가 있었습니다. 누이는 얼른 바로의 딸에게 가서 아이를 젖먹일 히브리 유모를 구해드릴까 묻습니다.

공주가 허락하자 누이는 제 엄마를 데리고 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자기 엄마에게 양육을 받으며 자라게 됩니다. 게다가 바로의 딸에게 삯을 받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버지는 사내아이를 죽이라 명령을 내렸는데, 그 딸을 통해 히브리 아이가 보호받고 자라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바로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으로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읽은 1장에서도 두 히브리 여인을 통해 아이들의 생명이 지켜지는 것을 읽었는데, 오늘 본문도 아이의 엄마, 아이의 누이, 그리고 바로의 딸까지 모두 여인들에 의해 생명이 지켜지고 보호받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끝까지 지켜본 이들도 여인들이요, 부활의 첫 증인들도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여인들을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당신의 사람들을 길러내고 계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중에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보다’라는 단어입니다. 2절에는 아이가 잘 생긴 것을 엄마가 보았습니다. 4절에는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라고 했는데, 이는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았다‘는 말입니다. 5절에는 바로의 딸이 갈대상자를 ‘보고’, 상자를 열어 ‘아기를 ‘보았’습니다.

이 세 여인의 ‘봄'을 통해 아이의 생명이 지켜졌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돌보다, 지켜보다, 살펴보다 모두 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보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의 희망의 역사가 싹트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봄’으로써도 이런 일들과 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으로 살피고 돌보고 지켜보아 귀한 생명의 역사에 늘 쓰임받으시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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