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96장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모세가 어머니로부터 양육 받게 되었고,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자기 형제가 애굽인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혈기가 지나쳐 애굽인을 죽이고 맙니다.

그 일을 숨기려고 애굽인의 시신을 몰래 묻어두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미 히브리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후 바로도 알게 되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모세가 애굽인을 때려 죽인 것은 자기 동족을 구하려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앞의 여인들의 이야기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한 행동이었는데, 앞의 여인들과 달리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여인들의 행위와 모세의 행위는 살리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달랐습니다.

모세는 폭력을 사용하여 동족을 구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행위에는 살림은 있었으나 죽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삶에 따라오는 결과도 달랐던 것입니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여기고 의롭지 않으면서, 폭력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당하기는 하셨어도 누군가를 희생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죽인 시신은 모래 속에 묻혀 있었지만, 그의 살인의 행위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죄는 모래 속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을 모세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고 거기서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의 딸 십보라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여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모세가 미디안에 거하는 동안 모세를 죽이려던 바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여전히 고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24절과 25절은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 이전에는 여인이, 누이가, 바로의 딸이,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가 어찌어찌 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하나님이 주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짧은 두 절에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4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돌보셨고’, ‘하나님이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난을 모른 척 외면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라 계속 돌보시고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산파들, 요게벳, 미리암, 바로의 딸 그리고 모세의 성장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계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질 때에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과정에 함께 하시고, 우릴 기억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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