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빈들에서 일으키신 기적 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물고기 2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12광주리에 가득 남을 만큼 놀라운 기적이 베풀어졌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한 끼의 식사였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들의 한 달, 혹은 평생의 양식을 보장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단 한 끼의 식사를 통해 배고픈 이들의 잠시의 허기를 달래주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해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식사 한 끼를 해결해 주신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요?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4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그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5천명이 먹었다는 사실보다는 주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더 큰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온 종일 따라다닌 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져 있을 것을 아시고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한 끼의 식사라도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신 것입니다. 그 식사는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담긴 한 끼였습니다. 내일 또 배고파질 인생이지만, 오늘 한 끼만큼이라도 배부르게 해 주고 싶으신 주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한 끼는 백성들에게 평생 기억될 사랑의 한 끼였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부유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식량이 없어서 한 끼분의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아들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곧 죽을 작정이었던 사르밧 과부는 무엇 때문에 마지막 한 끼 식사에 미련을 두었을까? 그 식사를 하고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한 끼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내일 죽을지언정 오늘의 한 끼를 염려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의 본문은 얼마 전 읽었던 본문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마지막 서신입니다. 바울의 죽음을 예감한 동료들이 모두 떠나버린 상황에서 쓴 편지입니다. 6절 이하를 보면 이제 바울은 세상에 미련이 없어 보입니다. 다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이 주실 면류관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겉옷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합니다. 21절에 보면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재촉하여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독한 추위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당장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바울이지만, 오늘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죽어도 당장 오늘의 필요를 걱정하는 존재,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죽게 될 생명이라 하더라도 오늘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디모데는 지체함없이 곧장 겉옷을 가지고 바울에게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하루라도 따뜻하게 지내실 수 있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 끼를 먹고 죽으려고 했던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은 기근이 끝날 때까지 곡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습니다.

눈앞에 죽음을 앞두고도 한 끼를 먹기를 원하고, 추위를 피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인데, 오늘 무언가 절실한 사람들에게 그 필요를 채워주는 긍휼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마음에 크게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 어머니에게 어버이날 파란색 티셔츠를 사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난 분홍색이 좋아’라는 얘길 하셨습니다. 나중에라도 분홍색으로 한 벌 더 사드렸어야 했는데, 그걸 안 해드렸어요. 병원에 입원하시고 입을 기회도 없으셨지만, ‘사서 보여드리기라도 할 걸’ 하는 후회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족이나, 교우들이나, 어려운 이웃에게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 않는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내 앞의 누군가에게 ‘다음에 해 주자’하지 마시고, 오늘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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