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이 가르쳐준 전통을 잘 지키고 있노라는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칭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 대해 칭찬할 수 없었던 것인지 살펴보니, 성만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성만찬이 왜 바울에게 칭찬받을 수 없는 것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만찬은 초대 교회 때부터 중요한 의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예배는 대부분 성도의 집에서 모였고, 일반적으로 성찬 전에 교제의 애찬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형편이 넉넉한 성도들이 음식과 음료를 후원했습니다.

교회의 의례를 위해 음식을 후원한 후에는 내놓은 음식을 더 이상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교인들은 그 음식들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고, 공동체가 다 모였을 때 함께 나누어야 했음에도 편의상 자기들 먼저 식사하거나 임의로 음식을 먹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넉넉하지 못한 교인들이나 혹은 노예신분의 교인들은 애찬의 시간에 맞추어 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맡겨진 일을 하거나 생계로 인해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성도들이 애찬에 늦게 도착했을 때 먼저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간혹 취하기까지 한 부유한 성도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음식이 부족하게 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교인들 간에 위화감이 생기고 상처받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울은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은 교우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 없이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시간으로 애찬과 성찬의 시간을 왜곡되게 사용하는 교우들을 크게 책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성찬의 의미를 크게 퇴색시키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혀 믿음의 도리가 아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성도들을 보듬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이었기에 바울의 책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 성찬의 의미를 퇴색시킨 교우들을 향해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성찬은 주님의 살과 피로 세운 새 언약, 자기를 버려 만인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의 성찬은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향락으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희생의 헌신과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는 성도의 삶에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한 배려와 사랑이 살아있지 않다면 성도의 삶은 열매없는 것이 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성찬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과 희생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과 몸에 항상 새겨져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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