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이제 신령한 것들에 대한 문제로 넘어갑니다. ‘신령한 것’이란 ‘신령한 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인데, 신령한 일에 대해 말씀하면서 ‘성령’을 언급하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우상에 이끌려 살았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상에 이끌려 살던 시절에는 신령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이후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종교에서도 영적인 은사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된 은사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3절의 말씀을 바울이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를 저주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과 은사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고백하는 믿음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그 성령을 통해 은사가 주어지는 경우에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임하시는 성령은 그 은사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교인들이 동일한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다양한 여러 은사가 주어지고, 여러 직분이 맡겨지지만 한 분 하나님에게서 오시는 성령이시기에  그 성령의 은사를 통해 이루시려는 목적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들이 한 몸을 위해 일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이 자기가 받은 은사를 더 신령하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지 못한 교인들을 무시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은사를 받은 것을 교만하게 자랑하는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은 성령과 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은사를 받은 것이 교회의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의 요소가 된 것입니다.

은사를 받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에 머물게 되면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기 위해 한 행한 공로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만 있을 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은사를 주신 분의 뜻을 따를 때에 하나님은 더 큰 은사를 통해 분명히 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받은 은사도, 직분도, 달란트도 다릅니다. 그 다름은 오히려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 통로로 사용될 때 가장 복된 열매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모두 각자의 은사로서 주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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