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계속 방언과 예언에 관해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는 영으로 드리는 기도이기에 기도하는 이도 자신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의미를 알 수 없기에 통역의 은사를 얻어야 유익하다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에서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할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은 방언으로 기도를 드릴 때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나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내용에 대해 ‘아멘’할 수가 없게 되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깨달은 이성으로 드리는 다섯 마디의 기도가 더 낫다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알아듣고 그 기도에 대해 함께 ‘아멘’할 수 있어야 기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알 수 없는 방언의 기도는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회중 앞에서 기도를 드릴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공적 예배에서 방언이 사용되면 방언을 하지 못하는 다른 회중들은 예배에 집중할 수 없게 되어 전체적으로 예배의 역동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방언이 방해요소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적 예배 영역에서의 방언의 사용은 자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은사의 기본이 교회와 다른 교우들에게 덕이 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 다른 성도들에게는 관심이 없이 방언에만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방언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성도들을 향한 배려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 예배 안에서의 방언사용을 자제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회개의 열매에 있어서도 방언과 예언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온 회중이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예언을 하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을 통한 책망을 듣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예언은 여러모로 유익한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무엇을 구하고 추구해야 하는지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적 공동체입니다. 존재의 목적도 공적입니다.

사적인 유익은 자제되어야 하고 공적 유익을 위한 일에 더욱 집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사적 유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유혹들에 넘어지는 이들이 가끔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를 깊이 생각해보면서 새벽 기도의 시간을 통해 혹 우리에게도 다가올지 모를 그런 유혹들을 이기는 힘을 길러내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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