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장 20~34절 6월 7일 화요일
15장은 고린도전서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부활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복음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합니다.
복음 안에 서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 안에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들도 결국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게 될 때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는 성도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부활이 없다면 자신의 모든 수고와 노력과 희생이 다 헛수고가 되며, 교인들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삶이 이 세상뿐이라면 세상에서 성도들이 가장 불쌍한 존재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할 만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확고한 부활신앙 위에 서기를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 중에는 ‘이미 죽은 자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활할 수 있을까’ 염려하여 죽은 자들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그들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맞는지 틀리는지 바울은 그런 논의를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세례를 받았던 이유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냐며 부활신앙에 대해 흔들리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세례조차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이 없다면 성도가 복음을 위해 감수하는 박해나 위험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의 삶에 항상 존재하던 위험이 결코 그를 넘어뜨리지 못한 이유는 그에게 부활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더러운 행실로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이들은 마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부활이 없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든 박해와 위험과 죽음에 대해서도 맞서 싸울 만큼 강력한 힘을 부활신앙을 통해 얻고 있습니까? 부활신앙은 우리를 마지막 때에 살리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살아서는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 흔들림 없는 부활신앙 위에 서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