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맡아보는 자는 제단의 제물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것이 성전 제사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율법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것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그 규정이 흐릿해지면서 성전 제사가 흐트러졌고, 하나님이 말라기를 보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회복하라는 말씀까지 전하셨습니다. 그만큼 마땅한 규정이었기에 예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정도로 마땅한 권리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권리를 주장하여 후원금을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말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혹 지금이라도 재정 후원을 받으려고 하면 교인들 중에 ‘바울이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조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사역 당시에는 재정 지원을 받지 않았고, 후에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보내는 후원금만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자발적인 지원이 아니면 뒷말이 무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것이 바울의 자부심이고 자랑거리였습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였다는 사실 자체도 자신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의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자의로 행한 것이라면 삯을 받겠지만 직무로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이기에 삯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어제에 이어 바울은 계속 권리의 주장이 복음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포기하거나 절제하는 신앙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안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역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 교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적 배경을 전혀 가지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사역자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교인들을 대하고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주장하는 자세를 자제한 것입니다. 복음에 조금이라도 저해되는 것은 내려놓고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그 말씀을 심어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삶의 자리가 외롭게 느껴집니다.

오직 주를 위해 살았던 위대한 사역자요 전도자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도의 삶의 지표가 되는 분임을 보게 됩니다. 취할 자유만이 아니라 포기의 자유, 절제의 자유를 배우는 귀한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