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사무엘상3:10)

저는 소년 사무엘의 말씀에서 고요하고 묘한 순간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무엘의 행동은 밤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누워 있고, 성전의 등불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의 ‘밤’이라는 단어를 ‘내리막 때’를 표현하기 위한 은유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참된 만남은 밤에 일어납니다. 밤은 볼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밤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리기에 아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시간입니다.

밤은 사물들이 분명히 보이지 않고 또 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밤은 공포를 느끼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등불을 밝힙니다. 밤은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넋이 나가게 할 만큼의 어두운 과거와 두려운 미래가 우리를 덮칩니다. 우리는 악몽을 꿉니다.

밤은 당혹스러운 시간입니다. 소년 사무엘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늙은 엘리 제사장은 사태를 더디게 파악했습니다. 일상과 다른 그밤, 모두는 당혹스러워 합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사태를 일러 의식이 한계에 이르는 ‘임계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요동치는 감정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지금 이것을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명쾌한 대답들과 확신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제공하는 안정과 절대적인 확신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정신은 어떤 변화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진보적인 신앙인들도 보수적인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도 자주 밤이 찾아 옵니다. 당혹, 혼란, 임계점, 요동의 시간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둠의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새로운 것이 한밤의 도둑과 같이 임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거룩함은 너무 지나치게 대낮같이 명료하고 확실한 것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밤에 느껴지는 어떤 당혹감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밤, 그런 고요하고 묘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양육과 소명, 그리고 약속과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년 사무엘처럼 이곳을 밤의 장소로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월터 브루그먼의 <사순절 묵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