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29

십자가는 세상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공공정책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롭고 경이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만족이 없는 삶으로 굶주려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십자가는 죽음의 멸망과 부활의 승리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스스로를 믿는 삶은 지속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여기 매우 위험하기는 하지만 십자가의 절망과 부활의 승리를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모든 제도들을 무시하고, 자신이 쌓은 왕국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되,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진리를 세상의 권세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첫째 유혹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둘째 유혹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슬프게 하는 것 가운데서 결단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생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주장이 옮다고 다투는 신앙인들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나의 주장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일인지 되돌아봅니다.”

진보와 보수를 제쳐 놓고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간다면 얼마나 크고 새로운 에너지와 열정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굽히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의 표현은 점점 서정성을 더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긍휼의 행위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 생각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세상의 소유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통치자들은 아직까지도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과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뜻을 즐겁게 받아들이며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은 새로움을 기다립니다.

‘굳어 버린 지혜’는 새로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굳어 버린 부’는 새로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굳어 버린 권력’은 새로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오늘 즉시 받아들이고, 약간 뽐내도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안다는 것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나에게도 기쁨이란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월터 부그르만의 사순절 묵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