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가 재판정에서도 존재하는 현실을 본 전도자는 4장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부당한 억압에 대한 현실을 목도하고 탄식합니다. 억압을 가하는 사람이 있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현실이 목격되었습니다.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그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억누르는 사람과 억눌리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힘에 의한 부당한 폭력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일까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에서조차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실종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약자의 약점을 보듬어주고 때로 보호해주는 선한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공동체성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 전도자의 탄식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들보다 이미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악행이 얼마나 심한지, 죽은 자들은 그 악행을 보지 않아도 되니 죽은 자들이 복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경쟁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마음에 의해 그전 사람들보다 나아야 하고, 그전 사람들보다 높아야 하고, 그전 보다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힘이라도 갖게 되면, 전도자가 목격한 이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나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경쟁심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은 더불어 사는 길이 아닙니다. 서로 누르고 밟고, 먼저 차지하고 먼저 올라가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상생의 길은 막히고, 누르고 눌리는 일로 인해 점점 공동체성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를 누르고 억압하는 그 모든 일들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전도자가 일러 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생 힘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힘을 쥐게 되면 그 사람에 의해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누르던 이가 눌리게 되는 일들도 일어납니다. 힘을 쥐었을 때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사람들이 따르지만, 그가 떠나거나 죽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업적을 칭찬하지도 않고 새로 오는 왕에게 충성을 보이고 그를 따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누리려고 하지 말고, 시기와 경쟁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협력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헛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 이하에서 전도자가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사람은 혼자 보다는 둘이 낫다는 것입니다. 일도 수월해지거니와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하나가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습니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나 혼자 누우면 따뜻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함께 살아갈 길을 찾고, 더불어 사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전도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이유는 저마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고 자기 살 길만 찾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의 삶을 존중해야 상생이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나도 존중받고 인정받게 되어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진정한 ‘나’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로 동료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이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됩니다.

둘보다 셋이, 셋보다 넷이 나은 법입니다. ‘나만, 우리만, 우리 가족만, 우리 교회만’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야 주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상생의 길이 주님의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살아가는 원미교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