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왕을 언급하면서 지혜롭지 못하고 악한 왕을 염무에 두고 말씀드렸는데, 9절에도 그런 왕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라는 말은 악한 지도자를 상징하는 문구입니다. 왜냐하면 ‘주장하다’로 번역된 단어(샬라뜨)는 ‘다스리다 지배하다, 학정을 행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데 그 다스림에 의해 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왕이 바르게 다스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해로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스림이 더 심하면 백성을 착취하는 악한 왕이 됩니다. 인류 역사에 선한 왕(지도자)보다는 악한 왕(지도자)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었기에 전도자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한 왕도 죽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떠난 뒤에는 사람들에 의해 그도 쓸쓸히 잊혀진 존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 폭정을 휘두르던 지도자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니 살아생전 그렇게 백성을 괴롭게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바르게 다스려서 죽어서도 존경을 받고 그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는 것이 낫지 자기 힘으로 타인을 누르는 일에 힘을 쓰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아쉬운 것은 살아있을 때 악행이 심판을 받아야 그런 이들이 나타나지 않을 텐데 살아있을 때 심판을 받는 일이 적다는 것을 전도자는 탄식합니다. 그러니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잘 되고, 악인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때로는 악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의인이 받기도 하고 의인이 받아야 할 상을 악인이 받는 아이러니한 현실도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불의를 지적하는 죄없는 사람들을 핍박해서 권력을 공고히 하던 이들이 그 권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떵떵거리고 살던 것이 우리사회에서도 엊그제의 일입니다. 제대로 심판받지 않은 채 죽는 이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세상이 답답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허탄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필히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런 불합리한 현실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의 길로 갈 것인지,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갈 것인지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15절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고 합니다. 즉 주어진 일상에서 보람과 기쁨을 찾으라는 권면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내게 허락된 일입니다. 장래의 일은 내게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내게 허락된 일에 신실하고 그 삶을 바르게 살아가고, 거기에서 보람을 찾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분명히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루가 주 안에 있기를 바라며, 주의 도우심으로 복되게 하루를 살아가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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