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28~30절 12월 17일 금요일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물들을 지으실 때 새들이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다른 동물들은 다리가 네 개인데 반해 새들은 두 개밖에 안 주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있는 다리조차도 가느다랗고 힘이 약해서 걷고 뛸 때 볼품도 없이 뒤뚱거려야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등에는 웬 거추장스러운 짐들이 얹혀 있었기에 너무도 불편해서 투덜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등에 달린 짐을 활짝 펴서 힘을 주어 퍼덕여봐라” 그러자 새들의 몸이 땅에서 뜨고 공중을 날더라는 것입니다.
짐이라고 여겼던 등 위에 있던 것은 실상은 그들로 하늘을 날게 하는 날개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자기들의 다리가 가늘고 약한 것이 약점이 아니라 얼마나 큰 혜택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늘을 나는 새들의 다리가 사자나 하마처럼 튼튼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새들이 공중을 날기가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들만 그런 것일까요?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여길 때가 있죠. 그래서 낙담하고, 우울해하고, 행복해하지 못합니다. 때론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아파서 고통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의 짐들이 우리를 짓누르기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를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선교사로 헌신하신 선배님이 그런 얘길 해 주셨는데, 친구들 모두 번듯한 교회로 목회를 나갔지만, 본인만 목회를 나가지 못하고, 겨우 복지원에서 노인, 노숙인들과 지냈을 때 한숨으로 보낸 날들이 있었답니다. 거기서 한 일이라고는 복지원에 계신 무연고 원생들의 장례 치르는 일들이었답니다.
몇 년이 지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필리핀 빈민가에서 선교사역을 하는데, 거기 버려지는 시신이 있어 그 시신 수습하고 장레를 치루어 주었는데, 그런 시신들이 하도 많아서 한동안은 장례치르는 일이 사역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장례를 치르면서 빈민들과 유대관게를 맺어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거기서 하나님께서 왜 자신으로 하여금 복지원에서 그렇게 많은 장례를 치르게 하셨는지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실패고 짐인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선교사역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는 짐이 오히려 우리를 날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쉬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29절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시면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쉬게 하시겠다는 것은 짐을 아예 내려놓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었고, 짐을 버리게 하시겠다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는 짐을 잘 지도록, 짐 지는 것을 좀 더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소에게 씌우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멍에를 메기를 바라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짐이 쉽고 편안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나누어지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누어지는 짐은 훨씬 더 가볍고, 편합니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30도 가까운 더위속에서 군장도 무겁고, 총도 무거워 발걸음이 점점 쳐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일부러 두 친구가 속도를 늦추어 제 곁으로 와서 한 친구가 군장을 들어주고, 다른 친구는 총을 들어주어 제가 행군을 끝까지 완주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갈6:2에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리라” ‘서로’란 ‘서로 함께’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함께 서로의 짐을 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짐은 쉽고, 그 안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