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559장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용서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도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예수님께 ‘무엇이든 이유가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어라”고 한 모세의 명령에 대해 5장 3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음행 이외에는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오늘도 9절에서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가르침은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의 숭고함이 유대 사회 속에서도 희미해져 있었습니다.

남편들은 자기 마음대로 구실을 만들어 아내를 버리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이혼의 권리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남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혼하려는 이유가 자신들의 욕망 때문인 것을 숨기기 위해 모세가 ‘이혼할 때에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명령을 핑계 삼아 함부로 이혼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그와 같은 명령을 준 이유가 그 세대의 완악함 때문에 희생당하는 여인들을 보호하고자 함이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모세의 명령을 악용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아내들을 희생시키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록 소수였을지라도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남기신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편의 욕망을 희생당하는 아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시고 하셨을 것입니다. 법을 잘 아는 이들이 법을 이용하여 편법으로 탐욕을 채우는 것처럼 율법을 잘 아는 이들이 그렇게 율법을 자기들 탐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들이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도 결혼에 대한 인식이나 이혼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이혼을 부끄럽게 여기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결혼관계를 이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헤어지는 것이 나은 관계도 있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이혼에 대해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져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관계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있고 그 다음에 부모자녀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첫 번째는 부부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관계는 모든 이웃사랑의 시작점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곧 배우자입니다. 여기서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혼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 누군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온전한 사랑이 솟아 다른 이웃들에게로 흘러가게 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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