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49장

청년이 떠난 후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제자들이 모두 충격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물질의 풍요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던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부유함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시니 제자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성도들 가운데에도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경고를 주셨으니, ‘과연 부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도 되나?’ 라는 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말씀만 들으면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든지 택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은 부자들을 향해 천국의 문이 닫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삶의 목적을 천국에 두기보다는 물질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대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치 물질을 중심으로 살지만, 아닌 척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을 들킨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선과 구제와 사랑이라는 것은 바늘귀만한 작은 구멍의 역할만큼 밖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바늘귀만한 우리의 수고가 하나님의 의해 낙타가 통과할만한 큰 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힘으로 그 문을 크게도 할 수 없고, 열 수도 없지만, 오직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 말씀 후에 베드로가 ‘우리는 주님을 위해 다 버리고 따랐는데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기대에 찬 말로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세상에 소유한 것들을 버리는 사람은 백배를 받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끝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많으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리는 사람에게는 큰 상급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자칫 부자청년처럼 현세의 상급이 전부인줄 알고 살면, 먼저 되었다가 나중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우선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천국이냐 이 땅이냐’의 갈림길에서 늘 하나님이 기뻐하실 길로 행하여 사는 원미교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