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31장

21장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을 상당히 거슬리게 했습니다.

나귀타고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호산나 찬양하며 뒤따랐죠.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환전상과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어버리시는 행동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예수님께는 “왜 아이들이 하는 말을 금지시키지 않고 듣고 있느냐?” 흥분하여 따졌습니다.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대제사장, 백성의 장로들 모두가 예수님의 행동에 화가 머리 끝까지 차 오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백성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는 없어서 결정적인 꼬투리를 잡으려고 왔습니다.

23절의 질문이 그 꼬투리를 잡을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와 같은 일들을 하며, 누가 네게 그 권위를 주었느냐?” 이 질문에 예수께서 ‘하늘로서다’라고 답을 하면 즉시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다’라고 답하면, 주님의 가르침이 한낱 사람의 가르침이 되어버리니 이들로서는 좋은 올가미를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 이들에게 당신의 권위의 근거가 어디인지를 알려줄 필요도 없는 일이기에 주님은 답변하는 대신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권위의 근거가 하나님에게서인지 사람에게서인지 대답을 해주면 나도 너희에게 답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대답을 하든 자기들에게는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을 하죠. 주님도 ‘나도 대답하지 않겠다’ 대꾸하셨습니다. 그런 후 포도원의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말했을 때 첫째 아들은 ‘예’라고 답을 하고는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 그렇다면, 두 아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것이냐”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둘째 아들이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들은 요한이 옳은 길을 보였을 때 뉘우치고 믿었으나 너희는 믿지 않았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신앙은 입술에서가 아니라 결국 삶에서 그 참됨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예’라고 하는 입술과 ‘아니오’라는 삶을 가진 신앙은 결국 책망을 받을 수박에 없습니다. ‘아니오’라는 입술을 가졌다고 해도 돌이켜 ‘예’하는 삶을 입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예’하는 입술과 ‘예’ 라는 답을 가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삶의 열매를 갖고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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