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1~16절 3월 24일 수요일
찬송가 216장
천국 비유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안식일 이틀 전에 당신이 팔리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려는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략을 꾸미고 중상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한결같이 거짓된 삶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는 백성들이 혹여라도 민란을 일으킬까봐 명절에는 하지 말자는 얘기를 나눕니다. 진짜 두려워해야 할 일은 민란이 아니라 자신들의 거짓에 찌든 삶이 가져올 재앙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의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베다니 시몬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어느 날 식사 중에 한 여인이 아주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화를 분개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의 행위를 왜 그리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요? 제자들 말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일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유다가 재물에 탐욕이 있어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제자들 여럿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고, 이는 근본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비싼 걸 왜 저렇게 사용해?’ 가끔 성도들이 교회에 물질적인 헌신을 하는 것을 보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저 돈을 왜 교회에 갖다 내냐?’라는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안중에 없으니 봉헌하는 재물만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인은 향유의 가치가 아니라 예수님만을 바라보니까, 주님을 사랑하니까 그 향유조차도 기꺼이 주님을 위해 깨뜨려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누가 사랑을 하면서 그것의 물질적 가치를 계산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재물만 보입니다. 그것은 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돈을 벌거나, 사용할 때, 헌금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구제할 때에라도 항상 주님을 염두에 두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이 돈을 어떻게 얻게 하셨는지, 이 돈을 어떻게 쓰면 기뻐하실지, 어떤 마음을 돈을 벌게 바라시는지 이렇게 주님을 염두에 두고 돈을 대할 때, 재물에 대한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향유의 재물적인 가치만을 바라보자, 예수께서 직접 향유가 당신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헌신을 전하여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 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여 은 삼십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인과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온 우리들도 주님 앞에 여인과 같은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 주님이 기억하시는 헌신과 사랑의 삶이 우리에게 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