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첫날 마태복음 26:6-16까지의 말씀에는 향유 옥합을 주께 부어드린 여인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오늘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손에 향유 옥합을 하나 들고 있었습니다. 향유는 고대 중동 지역에서 자신을 찾아온 존귀한 손님이나 주인이 가장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어 드리기도 했고,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시신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도 했습니다.

향유의 원재료가 워낙 귀한 데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구할 수 없어 이란, 인도, 아라비아 등에서 수입해 왔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향유 한 옥합이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니 거의 일 년 치의 품삯을 들여야 살 수 있는 귀한 것이어서 상류층에서나 소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1년 치의 품삯을 부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왜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것일까요?

아마 예수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존재가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 행위를 당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행위라고 말씀하셨고, 여인의 이야기가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의 행동을 당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위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은 이 여인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으심을 언급하셨기 때문에 여러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행동을 어리석은 행동처럼 여기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고를 들었지만, 여인과 달리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말씀을 기억하여 주님이 떠나시기 전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향유가 아니라 그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여인만큼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대제사장들에게 약속하였습니다. 은 삼십은 120데나리온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닙니다.

유다는 그 돈으로 9절에서 말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을까요? 그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여인이 주님에게 품었던 사랑만큼 제자들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300데나리온을 아끼지 않은 여인과 30냥을 받고 주님을 팔아넘기기로 한 유다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300 데나리온은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과 사랑을 상징한다면, 은 삼십 냥은 예수님을 매개로 얻는 이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상징을 통해 우리의 삶을 대비해 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고, 예수님을 통해 은 삼십냥과 같은 그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예수님에게 순전히 나를 드리는 인생일까?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 싶어 하는 인생인가에 대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자리를 점검해 보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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