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144장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님은 그에게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의 첫 심문의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읽은 1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고 했는데, 이들이 의논한 결과가 바로 빌라도의 질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했다는 정치적 혐의를 씌워 로마에 기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신성모독이나 율법을 어겼다는 종교적인 이유로는 사형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법절차에 의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정치적인 반역의 혐의를 씌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답변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알고 계셨음에도 “네 말이 옳다”고 답변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씌운 혐의가 그것 외에도 많이 있다고 말씀하면서 그것에 대해 예수님의 변론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처럼 곤욕을 당하고 누명을 입으셨음에도 당신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18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음에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시기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자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을 풀어주지 않고, 명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를 이용하여 바라바와 예수님 중 한 명을 풀어줄 수 있는 선택권을 백성들에게 떠넘겼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묻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여 로마 사람들에게는 시행하지 않는 처형방식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십자가형을 요구했을까요?

그 이유는 신명기 21:23과 연관있습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이런 끔찍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는 대제사장들의 사주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이토록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종교의 목적이 ‘살림’에 있는 것인데, 이들은 ‘죽이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종교가 탐욕스러운 인간에 의해 이용당하게 될 때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워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는 사실 하나는, 결국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고 거듭난 삶을 사느냐 아니면, 다시 욕망과 더불어 살면서 예수님을 다시 한번 못박는 죄인된 삶을 되풀이하느냐 둘 중 하나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에 의해 우리의 탐욕이 씻김받고, 거듭난 존재가 되어 참 믿음 안에서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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