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143장

제육시 그러니까 정오부터 구시인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였습니다.

오후 3시쯤 예수께서 하늘을 향해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부르짖으셨습니다. 육신의 고통도 크셨겠지만, 이 순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슬픔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의 다윗의 기도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절절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을 고백한 기도가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22편 후반부에서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노래하고 찬양합니다. 예수께서 이같은 다윗의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외침은 단지 절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을 확신하고 드리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고백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를 착각하여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한 번 더 외치신 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후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 하나님 계신 곳에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들은 불쾌한 일이었겠지만, 이것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땅이 진동하고 죽은 자들이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난 일도 일어났습니다. 땅이 진동하였다는 것은 심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마지막 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부활에 대한 예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가 곧 생명이라는 사실,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를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죽으시면서까지 주님이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놀라운 사건들을 목격한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이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방인들의 입술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순종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문을 열게 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순종이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 안에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생명의 값은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견줄 수도, 대신할 수도 없는 존귀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의 피값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된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고 유일하고 존귀한 것임을 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의 생명을 담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생명을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 관계맺게 되는 이들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을 나누어 주의 자녀되도록 하라는 뜻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아주 값진 예비생명들입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을 부여받은 우리의 인생이 날마다 생명을 잉태하는 일에 사용되어진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의 생명의 통로 되기를 기도하며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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