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54장

어제에 이어지는 말씀인데, 오늘은 간음과 관련한 계명을 통해 이혼의 문제까지 언급하십니다.

실제적인 간음의 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음욕까지도 간음한 죄로 간주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눈이 실족하게 한다면 눈을 빼내고, 손이 실족하게 한다면 손을 자르더라도 결코 죄로 향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죄와는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면 쉽게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탐욕에 대하여도 주님은 한치의 양보없이 그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단호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느긋해서도, 여유를 가져서도 안 된다는 각성을 하게 합니다. 면도날도 도려내는 것처럼 확실하고 분명하게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하나님 나라는 그리고 축복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음의 문제를 다루신 예수님은 이어 이혼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이것 또한 유대인 남성들의 탐욕과 연결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내를 쉽게 버리는 행태들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나 랍비들의 해석에 근거해서 음식을 못한다는 이유로,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도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예수님의 말씀에 가로막히고 맙니다. 그 모든 것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시기 때문입니다. 음행한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아내를 버리는 것은 그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것은 아내를 버린 남편에게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걸림돌없이 그렇게 모세가 주신 말씀을 자기들 유리한대로 해석하여 탐욕을 재워오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주 불쾌했을 것입니다. 요리조리 피해가던 그들의 욕망도 하나님 나라의 본래의 정신을 따라 해석된 말씀에 가로막힌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여 순종하는 것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보다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맹세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맹세를 왜 이리 중요하게 다루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하게 하늘을 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맹세하는 습관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일입니다.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땅으로도 안되고 예루살렘으로도 안 됩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은 십계명의 3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지난 주일 읽었던 본문 스가랴의 5장 3절에서도 맹세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경홀하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걸고, 하나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자격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설득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라고만 말하면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않더라도 그 누구든지 우리의 얘기를 진실하게 여겨줄 수 있는 인격과 신뢰를 갖추는 중요하며,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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