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율법교사와 주님의 대화,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관련된 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 앞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되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사가 이렇게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주님이 율법교사의 대답이 옳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읽었느냐’였습니다. 율법교사는 그 부분에 대해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답을 주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성경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된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행하며 사는 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가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과연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질문한 것일까요? 율법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그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읽었느냐’에 관한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율법교사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는 하였으나 그것을 순종하며 살아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질문을 통해 주제를 바꾸려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으신 주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는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유대인을 돕는 이야기는 비유이긴 하지만 듣는 유대인들에게 불편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비유를 다 말씀하신 후 주님은 또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가 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답하지 못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다하죠. 사마리아인을 향한 불편함이 드러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 이웃이 누구냐’ 라는 질문에 이웃의 범주를 원수에게까지 확장하신 말씀입니다. 자비는 원수에게까지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 담긴 비유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었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가고 있습니까? 성경을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으로 읽는 것은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은 “너는 성경을 삶으로 읽어가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삶으로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한 자비를 우리는 누구에게 베풀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강도 만난 것과 같은 곤궁한 지경에 처한 이들은 누구일까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져주고 그 질문 앞에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단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질문에 바르게 응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