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특별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곁으로 나오는 당시로서는 진귀한 장면입니다.

당시의 어떤 랍비도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씀을 듣도록 허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환영하지 않을 법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죄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떤 죄인들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세리와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 통념상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간음했으나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여인처럼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저지른 이도 있었겠지만,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들의 엄격한 종교적 규례를 지키지 못하여 죄인취급 당하던 백성들이거나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이방인들과 교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나오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죄인들과 교류하고 함께 식사한다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예수님이 잃은 양 한 마리와 드라크마의 비유를 일러 주고 계십니다. 이 비유들은 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99마리를 놔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것이 지혜로운가?, 99마리가 서운해 하지는 않았을까?, 왜 하나님은 한 마리에 대해 집착하시는가? 여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것이 지혜로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99마리의 관점에서 보면, 잃은 양 한 마리를 향한 목자의 사랑을 보면서 나머지 99마리도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목자는 내가 길을 잃었을 때에도 저와 같이 열심히 찾으러 오시겠구나.” 한 마리는 그냥 한 마리가 아닙니다.

99마리도 그 한 마리가 될 수 있기에 잃은 양 한 마리는 결국 전부인 것입니다.

원래 100마리였기 때문에 한 마리가 빠지면 원래의 모습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머지도 찾아와야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온전함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드라크마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10드라크마가 다 꿰어 있어야 그 드라크마는 패물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한 드라크마라도 빠지면 온전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영혼이 하나님께는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의 마음은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이루는 하나입니다. 온전함을 채워주는 ‘하나’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존재이기에 우리 영혼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천국의 잔치를 여실만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보실 다른 영혼들에게 대해서도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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