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와 더불어 잃었다가 다시 찾은 회복의 메시지를 지닌 세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비유를 잘 보면, 100중의 하나, 10중의 하나, 그리고 이제 둘 중의 하나를 잃는 비유로 점진적으로 잃어가는 것의 가치가 커지고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동물, 둘째는 물질, 셋째는 사람을 잃는 비유입니다.  사람을 잃는 이야기라 그런지 내용이 깁니다. 그만큼 중요성으로 따지면 사람을 잃는 것이 가장 큰 손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뒤집어 보면 하나님이 잃었다가 회복하는 것 중에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아들들은 우리들 자신을 상징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근본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는지에 대해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비유 속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 드러내 주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상속해 달라고 하는 불효한 자식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재산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시고 다시 예전의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상속분을 달라고 요구해도,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와도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을 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재산의 가치는 아들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기에 아버지는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안타까움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오직 다시 돌아온 아들만 보일 뿐입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버지는 금방 아들임을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아들이 자신이 잘못했으니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생각해달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이미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시고 용서하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돌아오는 그 자체는 이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위를 모두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결국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누구든지 용서하시기로 작정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원은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던 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늘 같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사는 존재가 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오히려 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를 섬겨온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얼마나 많이 일했는지 셈하고 있었습니다. 셈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잃어버린 재산을 셈하지 않고 있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일한 모든 것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둘째가 집밖의 탕자라면 첫째는 집 안의 탕자입니다.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아들, 그가 첫째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둘째 아들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에게로 돌이켰기에 그 자녀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 은혜를 입은 자녀입니다. 그런데 간혹 둘째 아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첫째 아들과 같은 셈하는 아들의 모습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아들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했던 모든 것들을 셈하면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 그리고 이웃에게 드린 모든 것을 셈하고 기억하기 보다는 수고하고 드린 것은 잊고 받은 것만을 기억하며 사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는 이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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