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해석이 난해한 본문인데, 단순하게 접근해 보겠습니다.

한 부자에게 고용된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평이 안 좋았습니다. 그 소문이 주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어 어느날 주인이 그 청지기를 불러 소문의 내용을 확인하고 청지기를 해고하겠다는 통보를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청지기는 이런저런 고민을 한 끝에 자기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기름 백말 빚진 자에게는 50말이라고 증서를 고쳐 쓰도록 해 주고, 밀 백석 빚진 자에게는 80석이라고 고쳐 쓰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자신이 쫓겨나게 될 대 누군가는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 청지기를 혼내거나 고소한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일을 하였다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해석에 어려움을 제공합니다. 왜 예수님은 비유에서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비유는 주인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청지기는 누구를 상징하는지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면 의미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함부로 낭비했으니 옳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인의 것으로 자기 배를 불렸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들통나게 되자, 이전과는 다르게 재물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율법에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시의 실상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이 비유를 본다면,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을 50말이든 20석이든 탕감을 해 주었다는 것은 그 이자 분을 탕감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청지기의 행동은 동네 이웃들로부터 그 주인은 이자를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는 것을 기뻐하시며, 백성들은 그런 부자들을 칭송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광은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니 청지기의 행동은 주인을 존귀하게 했으니 참으로 지혜로운 일을 한 셈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 탕감해 준 약수만큼은 청지기가 주인에게 받을 삯이나 퇴직금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만약 쫓겨나게 된다면 그것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몫만큼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해주니 청지기는 자기 것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운 것이 되고, 어려운 이들은 빚의 짐을 덜게 되는 것이었으니 그 자체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인이 청지기가 자기 욕심을 챙기지 않고 제몫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어 결국 자기도 살 길을 얻게 되었다는 면에서 지혜롭다고 칭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끝까지 자기 것을 챙기려고 했다면 그는 곤경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가게끔 사용하였으니, 결국 하늘이 돕든지 도움 받은 사람들이 돕든지 청지기에게는 도움이 흘러갔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재물을 가치 있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얻은 재물이든지 그 재물을 통해 더 가치 있는 것에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친구는 물질보다 더 상위의 가치입니다. 썩을 것으로 썩지 않을 것을, 없어질 것으로 영원한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사는 삶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재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충성된 자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지혜롭고 충성된 자로 이 말씀의 의미를 살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