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역사는 참으로 기구합니다. 2천 여 년 나라를 잃고 각처에 흩어져 살다가 2차 대전 때는 600만명의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나찌의 억압과 학살 아래 죽임을 당했던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2차대전 기간 어느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잡혀와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이들의 억울함과 두려움은 실로 헤아리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죽은 자들의 신발, 옷가지, 어린 아들들의 장난감과 인형, 안경 등 생전에 지니고 있던 물품들이 방마다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그들이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 벽을 손톱으로 긁은 자국들도 남아 있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 절규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그때 한 사람이 조용히 나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저 사형수들과 함께 죽임당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는 절기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메시야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신 예수, 그분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화려하고 장엄한 곳에 계시지 않을까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얼굴이라도 뵐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을 상징하는 두 장소가 나오는데 그 두 곳이 화려함, 장엄함, 높음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 두 곳은 바로 구유와 십자가입니다. 구유는 냄새나고 추한 곳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거기서 출산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거할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구유일까? 왜 하필 가난한 사람이 거하는 곳보다 더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오셨다면 그보다 낮은 곳에 거하는 이들이 주님을 찾아가기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사람이 거하는 자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오셔서, 세상에서 제일 낮은 자라 할지라도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꺼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죄수의 형틀이며 가장 잔인한 죽음의 장소입니다.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장소입니다. 가장 무거운 죄를 지은 죄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어느 죄인이라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지신 십자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라도 당신에게 나아와 구원을 얻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높고 화려하고 장엄한 곳에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구유와 십자가로 내려와야 만나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가능성이 큰 사람은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기보다는 낮은 곳에 눈을 두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곳은 사탄이 가려고 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도무지 교만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는 천사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올 성탄에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게 되시기를 바라며, 또한 감사와 영광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