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 연동 없이

해마다 유월절 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 방문해서 하나님께 정해진 제물을 드리며 절기 예배를 지켰습니다. 마을 사람들, 친척들과 동행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 중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당연히 그 무리에 섞여 있을 줄 알았던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유대관습에 의해 성인식을 할 만한 나이였지만 여전히 12살은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할 나이였기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루 길을 왔기에 그만큼 길을 되짚어 가야했는데,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며칠 동안  아이를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그러다 겨우 성전에서 발견했습니다.

잃은 것은 하루인데, 찾는 데는 3일이 걸렸습니다. 무엇이든 그런 것 같습니다. 본문은 잃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이지만, 이것과 달리 우리 삶에서도 잃어버리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되찾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관계도, 사람도, 어느 것이든 되찾고 회복하는 데는 많은 수고와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잃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잃었을 경우 우리는 그 믿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듯 우리도 잃어버린 믿음을 성전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 계신 성전,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 주의 말씀을 듣는 그 저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ㅊ발견했을 당시 예수님은 성전에서 랍비들과 성경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랍비들은 예수의 지혜로운 답변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책망하였으나 어린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은 대답이었습니다. 특히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같은 호칭은 낯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지만,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12살 때부터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할 인생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생애가 시작될 때까지 예수님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신 이후에도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에게서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순종’이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여 사신 것이 어린 시절의 예수님이시라면, 성인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사신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과 육신의 유혹에 그 몸을 맡기는 이들의 삶과 어린 시절은 부모에게 커서는 하늘에 그 몸과 마음을 맡기는 삶이란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면 부모의 보호와 권한 아래 삶을 누리고 하늘에 순종하면 하늘의 보호하심과 권세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그 순종이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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