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게임이나 운동경기 할 때 내기를 거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기를 걸려고 하는 마음이 들 때는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가 게임이나 경기에서 이길 확률이 높을 때입니다. 질 것이 뻔할 때 내기를 거는 경우는 없습니다. 심심풀이나 적은 돈을 걸 경우는 한번 재미 삼아 걸 수도 있겠지만, 내 재산 전부를 건다고 할 땐, 확실히 승산이 있을 때에만 겁니다.

만약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경우는 더욱더 확실한 승산이 있을 경우, 아주 승률이 높을 경우에 걸겠죠. 만약 승률이 반반인 경우라면 여러분은 그런 게임에 생명이나 전 재산을 걸 수 있겠습니까? 아마 한 분도 없으실 겁니다. 우리의 생명이나 전 재산을 50%확률에 맡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게임이나 경기를 통해 내기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승률이 거의 없는 게임, 확률이 높지 않은 경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처럼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어떤 가능성이나 확률이나 승산이 호가실해서 본토 아비 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유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한’ 체 나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1:8). 그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시작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희망과 가능성은 바로 그 약속 안에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며, 존재양식이 희망 즉 소망입니다. 희망은 우리 자신에게 토대를 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의 토대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에 천사들이 들녘의 목동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전하면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나심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증거로 천사가 언급한 것이 다름 아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였습니다.

어떻게 그 연약한 아기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말일까?

도무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목동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왜입니까?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백성들의 진정한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라면 그 아기가 희망의 실체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달려간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느냐는 소리가 많이 들려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미 앞서 경험한 서구 교회의 퇴락과 교회의 무기력증은 그런 경고를 소홀히 넘길 수 없게 만듭니다. 교회는 수적으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고, 한국교회 교인들의 증가율도 멈추었으며, 지금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 그런 경고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믿게 만듭니다.

그동안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우리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랑하느라고 희망의 실체인 하나님을 보여드리지도, 바르게 증거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큰 교회가 되는 것을 자랑했고, 예수 믿어 성공하고 부유하게 된 것을 자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리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당황스러운 현실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회복한다면, 즉 진실한 믿음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200년 전 조선백성이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한 희망을 교회를 통해 발견하였듯이 이 시대도 그렇게 교회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희망의 절기인 강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셨듯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도 이 시대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마음에 품고 사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 역할을 책임 있게 감당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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