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를 향해 요한이 갑자기 독설을 내뱉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실로 무서운 독설입니다. 다가올 진노를 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독설을 날린 이유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세례만을 받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그 죄된 삶을 버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다가올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씨를 뿌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으니 결국 죄의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그것을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무리들도, 세리들도, 군인들도 모두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요한이 그들에게 알려준 내용들을 보십시오. 무리들에게는 옷 두벌 있는 자, 먹을 것 있는 자는 나누라고 말씀했습니다.

옷 두벌 있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먹을 것이 남은 채로 그대로 있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사실 이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나누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내 옆에 옷 없는 자, 먹지 못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눠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옷 두벌 이상 가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옆의 사람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리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군인들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상식적인 선에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세리가 정해진 것 외에는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 군인이 백성들의 것을 강탈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상식적인 일인데, 당시엔 그 상식마저 지켜지지 않는 욕망의 사회였던 것입니다.

욕망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자신도 그 세상의 조류를 따라 상식과 양심을 저버리고 욕망을 선택하게 될 때 우리는 다가올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이 비상식적이고, 비양심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고 하여도 성도는 그 가운데서조차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세상의 조류를 타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요한의 모습을 지켜본 백성들이 요한이 혹시 오실 그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요한은 자신은 오실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작은 존재임을 드러내고 오실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불과 성령으로 베푸실 세례란, 죄를 모두 태우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불에 태우십니다. 같은 불이지만, 죄를 태우는 불은 은혜요, 쭉정이를 태우는 불은 ‘회개 없는 나’를 태우는 심판입니다. 어느 불을 만나야하겠습니까?

은헤의 불을 만나고 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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