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 목요일 QT


교회는 정죄와 책망이 넘치기보다는 사랑과 섬김, 선을 행함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고 돌봐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의 미숙함을 지적하고 탓하는 것으로 자신의 성숙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강한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약한 자의 미숙함을 감싸주고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돌봐줄 수 있는 것이지, 힘이 없는 자가 힘이 강한 자를 돌봐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믿음이 강한 자’가 아니라 그냥 ‘강한 자’, ‘약한 자’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꼭 믿음의 영역에 국한되어 해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힘이 강한 것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권세가 강한 것, 혹은 숫적으로 많은 것, 사회적 지위의 강함, 주인과 종, 고용자와 피고용자 등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어쨌건 15장 1-2절은 강한 것이 무엇이든 그 강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하였습니다. ‘담당하라’는 말의 원어에는 ‘참고 견디다, 짐을 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약자의 약점을 함께 지고 참고 견디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고 그 위에서 섬김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성도들은 그렇게 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웃, 즉 약한 자를 기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들을 돌봐주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며, 선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성도에게 그렇게 권면하는 또다른 이유는 예수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듯이 성도들도 그분의 순종하심을 닮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에 유대인 성도와 이방 성도들이 한마음이 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5-6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계속 7절에 이렇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같이 너희도 서로를 받으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서로에 대하여 받아주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조상들에게 주신 메시야 약속을 확증하시기 위해, 그리고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할례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의 종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스스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집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 일에 이방인들도 포함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바울은 10-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 성도도, 이방인들도 예수께서 스스로 겸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순종하신 것처럼 그 길을 따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바울의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깊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도 순전한 모습으로 그 삶을 배우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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