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목요일 QT


2장에서는 갑자기 바울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이는 바울이 가상의 누군가를 설정하고 이야기하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가상으로 설정한 대상은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1장 18절부터 32절까지의 불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런 악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적용된 기준은 유대인들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유대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다면, 그 기준 그대로 너도 판단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해서 심판이 모면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은 동일하게 각자의 행위대로 시행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시고, 당을 짓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는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관계없이 진노와 분노를 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습성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쉽게 비난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그런 모습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면, 악을 행하면 유대인에게 먼저 환란과 곤고가 있고 그 다음이 헬라인이며, 선을 행했을 때에도 유대인에게 영광과 존귀가 있고 그 다음으로 헬라인에게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먼저 택함받은 사람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공평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해서 용서가 더 크게 주어지고, 화는 작게 임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따라 판단을 받고 상급이나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차별이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은 그들을 영적으로 병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먼저 선택하신 은혜를 감사히 여기지 못하고, 자신들만 누리는 특권으로 생각하고 만 것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제사장적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을 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권리만 누리려고 했던 이기적인 마음이 결국 그들 신앙과 삶을 병이 들게 한 것입니다.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자만심으로 나아가면 넘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그 가르침이 자신을 향하여 먼저 방향지어질 때 우린 온전한 성도의 한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상대에게만 향하면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의 병폐는 우리의 질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바울의 논증 가운데 중요한 구절을 뽑으라면 6절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보응한다는 말은 되돌려주다, 보답하다, 갚아주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을 행하여야 할 이유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갚아주시고 되돌려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고, 전도서의 말씀대로 떡을 물위에 던지시기 바랍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항상 선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우리 원미교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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