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목요일 QT


7장 1절에서 바울은 ‘법을 잘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라고 언급합니다.

즉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바울은 사람이 법에 구속을 받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나 법적인 효력이 발휘되는 것이지 죽은 존재에게 법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니 전남편과 같은 율법의 효력으로부터는 이미 벗어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성도는 율법의 법조문이 아니라, 오직 영의 새로운 것 즉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씀을 앞의 6절까지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에서 ‘탐내지 말라’고 하시기 전에는 탐내는 것이 죄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것처럼 율법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가 죄가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짐으로 인해 죄가 드러나게 되어 결국 사람이 죽음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아는 자들 중에는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결국 죄를 짓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는 11절의 표현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죄는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단지 율법으로 인해 죄가 극명하게 드러났고, ‘나’는 죽어야 마땅할 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입니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신령한 것이라고 14절에서 말씀합니다.

단지 사람이 인간적인 욕망에 이끌려서 죄의 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무엇이 악인지를 안 뒤에도 자신 안에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알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바울은 그처럼 곤고한 자기 자신을 율법으로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누가 자신을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인가?”는 그런 절망감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사망의 몸에서 건짐받는’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죄인일 수밖에 없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선물로서 영생을 허락하실 것을 믿기에 오늘도 순종의 자리, 사랑의 자리에 서고자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 자리에 서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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