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사울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런 사울의 모습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당혹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당혹감은 적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적대감은 곧 살의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마음이 바뀌게 된 데는 아마 사울의 열정과 수고가 열매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이 그들에게 점점 위협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던 사울의 처지가 바뀌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유대인들의 결의가 심상찮은 것을 알고 교인들이 사울을 위해 피할 길을 엽니다. 성문으로는 나갈 방법이 없으니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려 사울을 피하게 했습니다. 겨우 탈출한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은 주의 제자들을 사귀려고 했지만, 제자들과 교인들은 사울의 회심을 알 길이 없었으니 아무도 사울을 만나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에 대해 알고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만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누가의 오늘 기록을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망친 후 바로 예루살렘으로 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1장 17절을 보면, 회심 후 3년 뒤에 베드로를 만나러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사도행전 본문 25절과 26 사이는 3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있는 것입니다.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의 교인들은 사울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의 회심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이 진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적극 도운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이방 선교에 선택받은 일꾼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언제일지 모르기에 지금은 사울이 교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잘 잡아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공동체 안으로 녹아들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 일을 바나바가 잘 도와준 것입니다.

그 덕에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증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자신들과 한 동류였던 사울이 자신들의 반대편에서 적극 예수를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을 지켜보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을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도 논쟁을 하며 예수님을 증언하였지만 그들의 반감만 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였습니다. 사울의 열정적인 복음 증거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사울은 점점 더 죽음의 위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인들은 사울을 가이사랴로 피신하게 하였고, 거기서 사울은 고향 다소로 건너갔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의 교회는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도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있던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교인들이 주를 경외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성령께서 그들을 위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는 결국 하나입니다. 경외하는 이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든든히 세워져 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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