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4절에 보니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란 어떤 영이었을까요?

‘악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라아’라는 단어인데 ‘나쁘다, 불쾌하다, 까다롭다, 불행하다’등등 꽤 많은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창47장에서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내 나이 130년에 험악한 삶을 보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이 단어가 ‘험악한’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을 ‘라아’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험악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악한 영’이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영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뒤에 사울이 정신적으로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인 병리적인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보이는 정신적인 불안 증세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울은 왜 그렇게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반복적으로 불순종하였던 죄들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났으니 그로 인해 그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정신적인 고통 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사울이 악한 영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았고, 그 악한 영을 수금 연주로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음악을 통해 악한 영을 다스리려는 시도는 고대 사회에서 종종 있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추천하였고 곧 다윗은 사울의 부름을 받고 궁전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다윗이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던 사울, 그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그와 어려서부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였던 다윗, 불안과 두려움을 수금연주로 치료해 줄 다윗이 만난 것입니다. 이 장면이 불순종을 순종이 대치하고, 교만을 겸손이 대치하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묘한 인연입니다.

다윗의 연주는 사울의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을 무척 아껴 자기의 무기 드는 자로 세웠고 아예 이새에게 다윗을 자기 곁에 둘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다윗에게 연주를 하게 하여 안정을 되찾곤 하였습니다.

사울이 안정을 취하게 된 것은 다윗의 연주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상태인 것이 가중 큰 이유일 것입니다. 같은 찬양을 불러도 부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와 그렇지 못할 때 듣는 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평안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영의 이끄심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삶의 태도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은 사울과 성령의 소욕에 이끌린 다윗은 삶에서도 열매가 달랐고, 타인이 그의 존재에서 느끼는 마음의 안정감도 달랐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윗과 같이 은혜를 주고 평안함을 전하는 통로로 이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 평안함을 느끼고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축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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