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다윗을 미워하게 하였을까요?

그 시작은 백성들이 자신보다 다윗을 더 높이는 것에 질투를 느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질투와 시기를 다스리지 않고 점점 키워가며 다윗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 하였습니다. 사위로 맞이한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요나단이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기뻐하셔 놓고 왜 이제 그를 죽여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려 하느냐 따졌습니다. 사울 곁에서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일을 바르게 행하도록 조언하는 사람은 요나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여 요나단이 다윗을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맹세도 잠시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미갈의 도움을 받아 다윗이 목숨을 건지고 그후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로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있는 라마는 사울왕궁에서 2-3km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사무엘에게 간 것은 그가 자신에게 기름부어 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기 때문이요, 그것은 다윗이 이제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기 위해 사무엘에게 간 것입니다. 그래도 거리가 너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피한 것도 잠시 다윗이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사울에게 전하였습니다.

사울은 바로 다윗을 잡으려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전령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그들이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사울은 다른 전령들을 보내는데 그들도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 전령을 보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내려 예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사울이 보낸 전령들이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직접 다윗을 잡으려고 라마로 갔습니다. 이런 사울의 행보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기더니 여기서도 하나님의 뜻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서도 무시한 채 자신이 다윗을 잡으러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내놓고 ‘내가 다윗을 보호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을 잡으려고 간 것을 보면 사울도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라마에 도착한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고 그도 다른 전령들처럼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울도 예언자 중에 있느냐’는 사울을 조롱하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이 잠잠히 있으라는 경고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겸허함을 잃어버린 사울은 끝내 제 고집을 꺾지 못하고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를 잊고 만 사울, 결국 멸망의 길로만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울에 비해 사울의 지근거리여서 위험한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며 라마로 갔던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거기서 은혜와 도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누구를 의지할 것인지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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