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장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상을 기록하였다면, 오늘 19장은 한 레위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사회적 타락상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한 레위인이 첩을 두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첩을 두는 경우는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 혹은 단순히 육신의 욕망을 위한 경우 첩을 두었다고 합니다.  레위인의 첩으로 들어온 여인은 다른 남자와 행음하고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행음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대부분은 ‘행음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가끔 ‘화를 내다’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문맥상 이 여인은 행음했다기보다는 남편에게 무언가 화가 날만한 일을 당하고 친정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넉 달이 지나서야 아내를 찾으러 레위인이 장인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장인은 사위를 기쁘게 맞이하고 대접하였습니다. 나흘째 레위인이 집으로 떠나고자 하였으나 장인이 간곡히 청하여 하루를 더 묵게 됩니다. 그러나 장인이 또 그를 강권하여 머물게 하고 결국 하루를 또 지냅니다.

장인의 이같은 행동은 딸에게 더 잘 대해주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다음날에도 장인은 하루 더 지내고 가라고 권하지만, 레위인은 계속 지체할 수 없어 집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출발한 때가 늦은 오후였기에 집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동행하던 하인이 근처 여부스 족속의 성읍에 하루 묵었다 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머무는 것이 꺼림칙했습니다. 동족인 이스라엘의 성읍이 있는 곳에서 묵어가려고 길을 재촉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 있는 곳까지 더 걸어갑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의 성읍에 들어오긴 했으나, 나그네인 그들을 영접하여 하룻밤을 묵게 하려는 집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장인이 보여준 환대와 달리 베냐민 지파의 성읍에서는 해가 저물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레위인 일행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스토리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모습과 위태로운 이스라엘 사회상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추론에 의한 것이기에 본문의 의도를 벗어날 수도 있지만, 첩을 둔 레위인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레위인조차도 욕망을 따라 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도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당시 사사시대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모습을 증언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첩이 집을 나간 이유도 아마 남편의 행동이 그녀를 화가나 했던 것 같습니다.

넉달이나 지나서야 아내를 찾으러 간 행동이나, 후에 베냐민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라고 아내를 내어준 모습에서 이 레위인은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지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 레위인은 자식을 낳기 위해 첩을 두었다기보다는 자기 욕망을 위해 두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번째 모습은 장인의 집에서 받은 극진한 환대와 베냐민 성읍에서의 홀대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자기 동족이라면 자신의 일행을 환대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그 성읍에서는 잘 곳이 없는 레위 일행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나그네가 받아야 할 환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신10:17-19)에도 담긴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근본정신이건만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공동체의 타락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해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공동체에서 사라졌습니다.

욕망을 따라 사는 모습, 타인의 필요를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사회의 증거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에 고갈된 영혼들의 모습이 이럴 것입니다. 이같은 욕망의 사회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 길이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하는지 사사기는 이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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