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지파에 속한 위대한 신앙인이자 군인인 갈렙이 등장합니다. 갈렙은 나이가 많아 본인이 직접 전쟁을 치르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유다지파를 독려하며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갈렙은 기럇 세벨을 함락시키는 자에게 자기의 딸과 혼인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때 나선 인물이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었는데, 그가 기럇 세벨을 점령하여 악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악사는 출가할 때 아버지에게 샘을 달라고 요구하여 윗샘과 아랫샘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악사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름을 사사기가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여인의 이름이 기록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익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입다의 승리 후 죽은 그의 딸(11장)이나, 삼손의 어머니(13장)나, 레위인의 첩(19장) 등은 중요한 사건의 인물들이지만 익명으로 나오고, 갈렙의 딸은 그 이름 그대로 악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는 이런 기록의 차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익명으로 기록된 여인들이 나오는 “이 이야기들은 적합한 지도자없이 무너져 가는 사사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악사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사기의 이야기들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알려주는 기준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다스리는 사회에서는 여성도 자신의 이름을 가지며, 안전하게 살아가며, 당당히 자신의 필요를 요구하고 그 필요를 채움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악사의 이야기, 악사의 상황 안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었지만, 다른 이야기들에서의 상황 안에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좀 더 좁혀서 해석하자면, 갈렙과 악사의 인생과 가정 안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삶이 살아 있었으나, 다른 이들의 인생과 가정 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점을 드러내 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정과 공동체에서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받고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서는 무언가 다른 이익을 위해, 혹은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이 존중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살아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인격과 삶에 대해 존중과 배려를 받게 되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교회라면, 교인 한 사람 한사람의 인격과 삶이 존중받지 못하거나, 교회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인격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분쟁이 일어나는 몇몇 교회에서 종종 벌어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문제제기까지 묵살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신천지로 몰아가는 왜곡되고 병든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리더들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실수를 합니다. 그런 실수를 겸손히 지적하고 동시에 회복하기를 권하는 교인들에게 지도자들 또한 겸손하게 그 비판을 수용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매도하고 공격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 사사기의 이야기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에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말씀의 가르침을 벗어나 세상의 논리와 문화 속에 잠겨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삶의 요소들을 성경을 읽어가면서 발견하고 고쳐서 새롭게 되고자 하는 것이 큐티의 목적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아도니 베섹을 죽일 때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가나안의 전쟁문화를 은근히 받아들인 것이고, 오늘 본문 19절과 21절을 보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쫓아내라고 하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이 사사기의 성도들의 삶을 아주 조금씩 하나님의 다스리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들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었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틈은 점점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 우리의 연약한 심령을 인정하고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겸손히 수용하는 하루가 되도록 마음을 모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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