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제 20절을 보면, 갈렙은 모세가 명한 대로 아낙 자손들을 모두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21절에서 베냐민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7절부터 언급되는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도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분명히 22절에 하나님은 요셉 지파와 함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왜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는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바로 “노역을 하였더라”, “노역을 시켰더니”라는 구절(28, 30, 33, 35절)입니다. 이들 지파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는 대신 그들을 자기 지파 가운데 머물게 하면서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던 것입니다. 모두 쫓아내는 것보다는 노역을 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오게 될 이익, 그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들 지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들에게 주어질 이익에 더 초점을 두고 행동하다보니 그와 같이 넘어진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는 상관없겠지’라는 마음에서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려는 의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하면 더 순종할 것인가에 대해 갈렙과는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지난달 미국에서 해변가에 있던 아파트가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균열이 진행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속히 대응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 결국 한번에 무너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중요하게 눈여겨볼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32절과 33절의 말씀입니다. 아주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므낫세부터 스불론 지파에 대한 언급에는 ‘가나안 족속이 그들 지파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말씀하지만, 아셀과 납달리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오히려 이 두 지파가 ‘가나안에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의 차이는 아셀과 납달리가 그만큼 빠르게 가나안 족속에 동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약한 지파들이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셀과 납달리처럼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거주하게 되는 상황의 역전까지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이란 한 번 타협하면 더 많은 것을 계속 양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하나둘씩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말씀에 위배된 삶을 일상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처럼 화석화 되어 버립니다. 교회 안의 불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일하시지만, 사탄도 늘 우리의 틈을 노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기 위해 애쓰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