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인이 보낸 여인의 시신 조각을 본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흥분하여 일어섰습니다. 모든 지파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거기서 레위인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자신이 당한 일을 솔직히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인 것처럼 약간은 과장되게 말합니다. 자신의 허물, 즉 여인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 일이나, 여인의 안전에 대해서는 하나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허물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삿19장의 레위인의 이야기는 당시 여성들에게 인격적인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첩이기는 하지만 레위인은 이 여인을 향해 아내로도, 한 인격으로도 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행한 악행도 무서운 일이지만, 레위인이 보여주는 이같은 비신앙적인 생각과 행동 또한 심각한 죄입니다.

레위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스라엘 지파의 지도자들은 분개하면서 베냐민을 징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각 성읍마다 전령을 보내 악행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징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싸움을 준비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의 성읍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짓이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악행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 감각이 무뎌져 있어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큰 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희생을 당한 사람, 아픔을 당한 사람, 악행의 피해자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도 배려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모습입니다. 베냐민 사람들의 이같은 모습은 화를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이들의 전형입니다.

이같은 측면에서 보면 타인에 대한 배려는 영적 감각이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타인에 대한 긍휼의 마음도 사라집니다. 그 반대로 생각해보면, 타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져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맥을 같이 하여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한 서기관과의 대화를 통해 율법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변엔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걸 보는 눈이 떠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리고 그런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정서적으로 돕든, 물질적으로 돕든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것을 나누는 삶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우리를 부요케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을 늘 품고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원미교회 교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