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월요일 QT


28장의 2/3는 저주의 말씀입니다. 실제 저주의 내용은 57절까지이고 오늘 읽은 말씀은 전체적으로 저주가 오게 되는 이유에 대해 재확인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저주의 내용이 사뭇 무섭고 떨립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주의 긴 말씀들에 표현된 문자의 겉내용은 두려운 것들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리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토대를 어디에 두고 지금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까? 언약 신앙입니다. 멀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행하신 언약에 기초하여 주시는 말씀이요, 가깝게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산에서의 십계명을 통해 맺으신 언약에 기초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출34:27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행하는 것이고, 축복과 저주의 선언 또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이끌어 내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만 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순종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은 우리의 몫으로 늘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믿음을, 자원하여 드리는 사랑을 하나님께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큰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게 흐르더라도 잔잔히 임하더라도 신실히 변함없이 드리는 사랑을 기다리시지 않으실까요?

탕자의 비유 나오는 불의한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잃은 후 그제서야 아버지의 사랑, 그 은혜의 품이 어떠한지를 깨닫고 돌아오게 되죠. 돌아오는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의 품꾼으로라도 좋다’는 가난해진 마음이었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사랑을 갈망하여 돌아오는 아들에게 보여주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축복과 저주의 선언을 하시는 신명기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28장 본문 전체에서 축복 보다는 저주의 선언이 훨씬 길다는 것, 저주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선택해야 하는 길이 넓은 길이기보다는 좁은 길이기 때문에 저주의 선언을 길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길은 좁은 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7:4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하셨습니다. 축복의 길은 좁습니다. 왜냐, 축복은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하나, 순종의 길인데, 그 길을 가기가 그리 편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왜 그리 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주의하게 하시려고 저주의 선언을 길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틀에서 본다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지금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가려는 그 길을 가고 있나요? 아니면 찾는 이가 적은 길로 옮기고 있나요? 신명기 28장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우리 신앙의 길이 어느 길에 속하였는지,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살펴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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